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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이홍훈(李鴻熏) 大法官의 정년 퇴임을 맞아

임순남뉴스 기자 입력 2011.07.03 14:32 수정 2011.07.03 02:32

아! 34년의 法服 세월이여!
-이홍훈(李鴻熏) 大法官의 정년 퇴임을 맞아-

(사)소충?사선문화제전위원회 위원장 양영두

5월 31일 11시,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2층 로비에서는 1977년 서울지방법원 영등포 지원판사를 시작으로 法服(법복)을 입은 지 34년 만에 고창출신 이홍훈 대법관의 퇴임식을 맞는다.
이 大法官은 전주 북중을 나와 65년 경기고 졸업 69년 서울대 법대, 75년 서울법대 대학원 석사, 1972년 제14회 사법시험 합격, 74년 제4회 사법연수원 수료.
필자와의 만남은 국회에서 일하던 당시 문화방송 최성근PD(라디오국장역임)의 소개로 만나 고향의 벗으로 지금까지 친교하며 지내고 있다.
1980년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국민들은 80년의 봄을 기대하며 희망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신군부의 등장으로 봄소식은 사라지고 5.18광주민주항쟁이 전국을 짓누르고 있을 때 81년 9월 대전지법 금산지원장으로 발령이 난 이 판사는 금산으로 최PD와 나를 초청했다. 나는 당시 계엄법 위반으로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난 뒤의 후유증으로 몸이 망가져 있었고, 최PD는 강제해직 언론인의 신세였다. 우리 셋은 말없이 금산 인삼주 한동이(제법 큰단지)를 폭음했다.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당시에 수배 받고 있던 삼례출신 심재권(서울대 학생운동주도, 재야권지도자, 국회의원역임) 회장을 걱정하며 나라의 걱정,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학생들의 안위 걱정, 울분을 토로했던 시절이었고 말수가 적은 이 판사는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86년 시대의 아픔을 달래고 시작한 사선문화제를 창립하였을 때 꾸준히 고향을 위해 노력하라고 훈수했다.

세월은 흘러 89년 대구지법 김천 지원장(부장판사) 발령이 나 축하 차 김천을 찾았다. 가슴이 따뜻한 이 부장판사는 넉넉한 웃음으로 소주잔을 기울이며 세상사 방담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우정을 나누었다. 시간이 가는 동안 法官(법관)이라는 외로운 직업에 있는 이 판사를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수시로 전화하고 서로 격려하며 지내면서, 노모께서 계시는 고창 집 걱정과 동생들을 못 살피는 집안걱정 법복을 입은 외로움(!)을 토로했다.
95년 성남지원장, 97년 광주지법 수석부장판사, 2003년 법원도서관장, 2004년 제주지방법원장.
지금 생각나는 것은 97년 광주와 제주에 재직할 때 홀로 계시는 어머님 채귀례 여사를 관사에 모시고 있을 수 있어 너무 좋다고 자랑하던 것이다. 효심이 깊은 그의 진정한 마음을 느끼게 되었다. 2005년 수원지방법원장, 서울중앙지법원장. 여러 차례 대법관 후보 물망에 올랐으나 선택되지 못하다가 2006년 7월 드디어 대법관 후보로 추천되어 국회청문회에 출석케 되었다.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였던 이낙연 의원과 같이 축하인사를 나눈 나는 청문회장의 자리를 지키며 기원했다. 대법원장 같은 대법관이 되어 달라고....
나라를 사랑하고 법의 보호를 못 받는 약자를 위해 法(법)을 집행하는 名判官(명판관)이 되어 달라고....
이제 후배 판사들로부터 존경받고 근검 소박하게 생활 해 온 이 대법관이 언론 인터뷰에서 고향에 내려가 흙을 만지고 텃밭을 일구며 건강이 나빠지신 노모(90세)를 모시고 살아가겠다고 한 소식을 듣고 전화를 하니 고창 고향집을 수리하고 잡풀을 메러 퇴임식 마치고 곧 귀향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보면 송국유존(松菊猶存)이라는 글귀처럼 고향을 떠나 돌아와 보니 소나무와 국화는 그대로 있구나!
전북의 아들로서 못다 한 고향사랑 고향의 정(情)을 베풀고, 받으면서 존경받는 삶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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