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안 찬곳 찾아 험하게 살았는데 또다시 나가라니...”
“물 안 찬곳 긁어 먹으며 험하게 살아왔는데 또다시 나가라고 하니 나랏님이 원망스럽소.
다 늙은 우린 도대체 어디에 뼈를 묻는다 말이오.”섬진강댐(옥정호) 재개발로 40여년 만에 두 번째 이삿짐을 싸게 생긴 운암 주민들의 하소연이 하늘을 찌른다. 젊은시절 이곳에 정착했다는 김정남(73)씨는 “누구 때문에 정든 고향을 수몰시키고 떠나왔는데 다 늙은 우리보고 또다시 나가라니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이냐. 한평생 떠돌이마냥 집도 고향사람도 모두 다 잃었다”며 한탄했다. 운암 주민들은 1965년 섬진강댐 준공직후 2,100여 세대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이중 200여 세대는 가까운 현 면소재지 주변에 안착했다.그러나 향후 저수위를 5m가량 더 높이겠다는 수자원공사(정부) 계획아래 올해 또다시 이주해야할 처지에 몰렸다. 더욱이 1969년 대홍수 때 현 정착촌마저 물에 잠기면서 뒤늦게 수해 위험지란 사실이 밝혀졌지만, 정부는 이렇다 할 해명없이 개발규제 지역으로 묶었다.
이렇다보니 마을은 새마을운동기 모습 그대로 남겨졌고, 덩달아 이주 보상비조차 현실과 동떨어지게 책정됐다는 하소연이 쏟아지고 있다. 주민 홍종인(70)씨는 “나랏님이 시키는대로 이 곳에 강제로 떠밀려 왔는데 이주비라고 집 지을 땅도 못살만큼 쬐끔 쥐어주면서 재차 몰아내려하니 한스럽고 기가 막힌다. 딱히 호소할 곳도 없고 너무 억울하다”며 복받친 울분을 토했다.마을주민박승근(71)씨는 “한평생 집도 못 고치고 물 안 찬곳 찾아서 긁어(농사지어) 먹으며 험하게 살아왔는데 또 떠나라고 하니 막막하다. 어렵사리 의지하고 살아온 이웃들과 또 헤어질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며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마을 경로당은 이같은 막막함과 아쉬움을 달래려는 발길이 분주했지만,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야할 떡방앗간은 냉기만 가득찼다.마지막 떡방앗간 주인장인 최종진(75), 홍정의(67) 부부는 “한평생 떡방아 찧는 소릴 즐거움 삼아 살아왔는데 이젠 다 끝났다. 문 닫고 떠나려니 잠도 안 온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잠시 망설이던 부부는 서로 마주보며 “자식들에게 빚을 남길까봐 그게 걱정이지”라며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마을 곳곳에는 ‘우리는 끝까지 투쟁한다’, ‘웃자 참자 뭉치자’ 등 현실적인 이주보상을 촉구하는 현수막만 나부낄 뿐 인적은 뚝 끊겨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금새 녹물이 흘러내릴 것 같은 양철지붕은 수북이 쌓인 눈에 축 쳐졌고 온기 잃은 세간살이만 덩그러니 남겨진 빈집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
 |
|
↑↑ 운암 주민들이 삼삼오오 경로당에 모여 정부의 부실한 이주대책에 대해 하소연하고 있다. |
ⓒ 주식회사 임실뉴스 |
|
■ 주민들 "이주보상 현실성 없어"… 집단 탄원서
운암 주민의 기구한 운명은 국내 첫 다목적 댐인 섬진강댐이 건설된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 2,800여 세대 중 200여 세대는 그나마 가까운 현 운암면소재지로, 나머진 부안 계화와 경기도 반월 간척지를 나눠주겠다는 정부 약속을 믿고 이주했다.이중 간척지 이주민에겐 1가구당 5,000㎡(1,500평) 안팎의 농지분배증이 주어졌다. 그러나 계화는 1977년까지 바닷물이 출렁거려, 반월은 원주민 텃새에 쫓겨 농지분배증을 매각한 채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마지막 정착촌인 운암면소재지도 비슷한 처지다. 수자원 확대를 위해 2년 뒤 저수위를 5m(192→197m) 높이려는 정부 방침아래 재이주가 추진되기 때문이다. 당초 만수위(198m)도 안전하다며 이 곳에 정착촌이 조성됐지만, 1969년 물에 잠기면서 측량오류 사실이 드러났다.이후 개발 규제지로, 1999년 설상가상 상수원보호구역까지 지정돼 정착촌은 옛모습 그대로 남겨졌다. 모든 땅은 국·도유지라 개인소유는 없다. 이렇다보니 3,000만원 안팎의 건물 매입가, 여기에 개별이주는 지원금 3,500만원 정도, 뒷동산에 조성중인 이주단지 입주는 조성원가 분양 혜택이 전부다.주민들은 “정부 실책으로 또다시 이주하는 것도 억울한데 그 이주비조차 방 한칸 마련할 수 없다”며 지난달 27일 국민권익위원회에 집단 탄원서를 제출했다. 내년께면 실향민의 아픔을 기린 국사봉 망향탑만 남는다.새전북신문/정성학 기자 csh@sj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