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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신년 문학여행)아모르파티

임순남뉴스 기자 입력 2022.01.18 16:34 수정 2022.01.18 16:38

김진명의 자전적 소설 1

↑↑ 김진명 소설가협회장
아모르 파티
‘딸랑, 딸랑’
“온 누리에 평화가~”
임실시장 입구에서 구세군 자선냄비 종소리가 차가운 골목을 데우며 흘러간다.
구겨진 신문조각은 바람에 나뒹굴며 거리를 헤맨다.
매서운 한파 속에서 시민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폐를 꺼내든다.
목도리 한 고사리 같은 어린아이의 손부터 옷깃을 세운 주름페인 노파의 손들이 빨간 냄비에 이웃을 담는다.
주황색 군내버스는 추위에 짓눌려 빛바랜 모습으로 엉금엉금 터미널로 기어들어간다.

시간이 다 되었는데 최 박사는 몸속 깊이 밀어 넣은 스코프를 빼려 하지 않는다.
준호는 구역질이 나고 신물이 넘어와 숨쉬기도 불편하지만 약속 시간을 놓칠까봐 더 조급함을 보인다.
대부분 사람들은 한해를 마무리하기 위해 해넘이를 준비한다고 하지만 준호는 시간을 쪼개며 송년회 모임을 찾아다니기에 하루가 바쁘다.
흰 눈은 보이지 않지만 세밑한파가 동장군 되어 거리를 걷는 이에 발걸음을 움츠러들게 한다.
준호는 바쁜 일정을 알리듯 재촉하는 몸짓으로 눈꺼풀에 맺힌 눈방울 떨구며 최 박사를 올려다보지 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최 박사는 준호의 바쁜 일정을 눈치 챌 만도 한데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다.


“준호씨 왔어요?”
최 박사는 의사이자 원장 부인이다.
부부가 함께 진료하는 병원장은 준호의 대학동아리 친구다.
이들은 매달 부부동반 모임을 하는 절친 들이다.
“준비하시는 일은 잘 되고 있지요? 이번에는 꼭 군수에 당선 되어야 해요.”
“고마워요.”
“범수의 애절한 부탁으로 검진 받는다면서요?”
준호는 사실 몇 해 째 건강 검진을 미루어 왔다.
날 만 새면 행사장 찾아다니며 인사한다고 보낸 세월이 몇 년인가.
탱탱하고 준수한 얼굴은 어디 가고 머릿결은 희끗희끗하게 새어가고 있다.
“세화씨가 말 하더라, 준호씨 안쓰럽다고요.”
최 박사는 어느새 준호 부인과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다.
“전화 왔었어요?”
“내가 했지요, 세화씨 못 본지도 3주가 넘었고 그래서 전화 했어요?”
“그랬군요, 성민은 진료 중인가요?”
“예, 준호씨 오신다고 해서 아주 정밀하게 검사 하겠다고 제가 맡았어요.”
최박사와 성민은 같은 대학 의예과를 졸업하고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다 병원을 차린 캠퍼스 커플의사다.
성격이 쾌활한 최 박사는 부부모임에서 언제나 분위기를 이끈다.
나이도 성민과 동갑네기다 보니 다른 친구 부인들보다 연장자이고 언제나 앞장서 행동한다.
조금은 내성적이고 학구적인 성민은 활달한 최 박사 행동에 조금은 쑥스러워 하며 수줍어 한다.
“어쨌든 잘 왔어요, 범수 덕택으로 준호씨 내시경은 내가 직접 해야지롱.”
내시경실 안에는 불이 꺼져 어둠침침하지만 발랄한 최 박사 유머에 분위기는 환해졌다.
“남자들은 부인 말은 잘 안 들어도 아들 말은 잘 듣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준호씨도 범수 부탁이 없었다면 올 해도 건강검진 없이 지나갔을 것이죠?”
최박사의 물음에 준호는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아들을 생각한다.
아들 나이 23살, 한참 미래를 꿈꾸며 살았을 청소년기에 준호는 아들의 기둥이 되어주지 못했던 것이 늘 가슴 아파했다.
한때는 아들 범수가 준호를 롤 모델로 여기며 지냈던 시절도 있었다며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잦은 실패로 아버지의 위상마저 세우지 못하고 살아온 나날들이 싫었다.
“준호씨는 수면 내시경 싫어하지요?”
자존심 강한 준호는 수면 내시경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약하게 누워있는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아무튼 범수 덕택으로 준호씨 속 좀 드려다 볼까요, 속이 검은지 흰지?”
준호가 입안에 마취액을 머금고 있다 뱉으니, 간호사는 내시경 마우스피스를 끼우고 반창고로 입가를 고정시킨다.
“준호씨 스코프가 식도를 넘어 갈 때 꿀꺽 삼키세요.”
준호는 스코프를 꿀꺽 삼키고 최 박사에게 속을 열어준다.
스코프가 식도를 타고 체내를 촬영하기 시작한지 20분이 지났는데도 최 박사는 무언가를 자꾸 만 찍고 있다.
“음~”
최 박사는 옅은 숨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여러 번 찍고 떼어낸다.
“준호씨, 수고했어요. 좋아요 건강해요.”
준호는 입안에 고인 침을 베어내고 얼얼한 입 주위를 닦아내며 침대에서 일어나 최 박사를 바라본다.
“아무것도 아녀요, 아무 이상 없는데 혹시나 하고 범수 추천도 있고 해서, 정밀하게 보느냐 위 조직 조금 떼어봤어요. 아무 문제없을 거예요.”
“수고하셨어요, 내려 갈께요.”
“연말인데, 임실로 내려가는 거예요?”
“예, 년 말 행사가 여기저기 많이 있네요. 이틀 남은 한 해를 잘 마무리 해야죠.”
“항상 건강 조심하시고요, 후보등록 하면 친구부인들 모두 앞세우고 내가 도우러 갈게요.”
작별을 하려는 순간 진료실에서 성민이 나오며 말한다.
“내시경 잘 했냐?”
“응, 바쁜데 뭐하려고 나오냐?”
“이번에는 꼭 당선되어라, 너처럼 진실한 정치인은 어디에도 없는데 참으로 안타깝다.”
“사람 놀리지 마라.”
“두 분, 먼 소리 한데요?”
차트를 정리하고 나온 최박사가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먼 소리 긴, 가까운 준호 소리지 하하.”
성민의 유머에 모두가 밝게 웃는다.
준호는 정치를 약자의 눈물과 도를 닦는 일이라고 말한다.
“너는 학창시절 우리가 배웠던 공자의 정치사상을 실천하는 사람이야. 기 죽지마라.”
“공자가 뭐라고 했는데요?”
최 박사는 성민을 바라보며 묻자.“공자께서 정치는 도를 닦는 일이라며 정치가는 사람을 위한 고행하는 수행자라 하셨데요.”
성민이 장난하듯 최 박사에게 설교하듯 말을 건넸다.
“그렇구나, 그런데 공자는 영감 아니야?”
“영감이지, 친구 중에 검사 영감도 있고 교수영감도 있으니 군수영감도 있어야 하지 않겠남?”
“그럼, 당신은 어떤 영감이야?”
최박사는 남편 말을 이어받아 농담을 걸어본다.
“걱정 말어, 나는 평생 머리에 영감만 맴돌아 탱이가 슬어요.”
“그럼 당신은 영감탱이네.”
“하하”
“호호”
“허허.”


삐리리, 삐리리.

준호는 새해 벽두부터 신년인사를 드리러 마을을 다니고 있었다.
새해 첫 출근 날에 준호는 두메산골 근처에 인접해 있는 면사무소에 들러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삐리리, 삐리리.’
“여보세요?”
“준호씨, 새해 복 많이 받았어요?”
이른 오전에 최박사 전화벨이 재촉하는 성민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최 박사님 어쩐 일이세요?”
“보고 싶어 전화 했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성민이는 잘 있고요?”
준호는 최 박사한테 걸려온 전화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는다.
“준호씨, 차 한 잔 하게 전주로 올라오세요.”
순간 준호 머릿속은 온갖 상념이 뒤엉켜 회로가 부서지고 있었다.
직감으로 준호는 불길한 예감을 감지한 듯 허수아비처럼 한참을 말 못하고 멍하니 서있다 대답한다.
“바쁜데 나중에 가면 안 되나요?”
“….”
최박사가 말이 없자, 준호가 재차 말을 잇는다.
“전화로 말해줄 수 없나요?”
“예.”
“꼭 가야 하나요?”
“예, 꼭 와야 해요.”
“…….”
두 사람 간에 정적이 흐르자 최 박사는 원장 성민을 바꿔 준다.
“준호야, 어디냐?”
“응 성민아, 임실에 있어.”
“지금 당장 병원으로 와라.”
“뭔 일인데?”그제서야 준호는 며칠 전 성민이 부인에게 위내시경을 받은 기억이 떠올랐다.
“위내시경 결과가 나왔어?”
“응.”
성민은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별 문제 없지?”
“아니…, 결과가 안 좋아.”
“어떻게 안 좋은데?”
준호의 퉁명스런 말투가 무선음을 타고 성민에게 전해진다.
“구체적으로 말해봐.”
“캔서 같아….”
“뭐, 캔서?”
“….”
성민의 핸드폰에서는 신음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너, 오진 아니야?”
“….”
너무나 건강했던 준호로서는 믿기지가 않았다.
“알았다, 오후 2시까지 가겠다.”
준호는 핸드폰을 끄고 두어 발 걷다 멈춰서더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조용히 빠져나와 주차한 곳으로 걸어간다.
구겨진 윗도리와 허름한 바지를 두발로 끄는 준호의 초췌한 뒷모습은 상한 문어처럼 흐느적거리고 있다.
차속에서 시동도 켜지 못한 체 홀로 웅크리고 앉아 먼 산 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준호의 눈동자는 서러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정초에 아름다운 고향산천이 하염없이 먼 산으로 다가와 쭈그리고 있는 준호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
숨을 곳이 넓어 움직이지 못하는 두더지처럼 어둠마저 거절하는 몸짓으로 땅속 깊은 곳을 찾아 파고들고 있었다.
웅크린 준호의 그림자는 간간이 경련이 일으키듯 머리를 조아리며 검은 물체가 되어 떨며 움츠려 들었다.
그때도 준호는 머리를 벽에 부딪치며 덫에 걸린 사슴마냥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밤에는 불빛 한 점 없고 낮에는 온통 사방을 새빨간 페인트로 칠해 천정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골방에 삼일 채 감금될 때도 그랬다.
피투성이 된 친구들에 환상과 최루탄과 곤봉에 울부짖는 여학생들의 환청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도살장의 환후까지 밀려오는 그 방에서 소스라치는 준호의 몸짓이 재현되고 있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차 시트를 적시고 있었다.
준호는 대학시절 학생운동 했다는 죄목으로 수배되어 안기부에 끌려가 이십일일간의 고문을 당한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법전대신 짱돌을 들고 군부독재 최루탄과 맞서 싸우며 학생회장으로서 헌신해야 했던 그 시절에 젊음은 슬픈 자화상이었다.
인기척에 정신을 차린 준호는 차창 너머로 밖을 내다본다.
사람들은 면사무소에서 나와 하나 둘씩 식당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준호 눈가에 맺힌 액체에 반사되어 투영되어 간다.
점심때가 다가가고 있었다.
몇 시간을 혼자 차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준호는 호주머니에서 차키를 찾아 시동을 걸고 전주로 향했다.

“준호씨.”
로비에 있던 최박사가 준호를 보고 소리치자 원장실에 있던 성민이 문을 열고 나와 반긴다.
“준호야 어서와라, 원장실로 들어가자. 점심은 먹었냐?”
준호는 삼식이 마냥 반쯤 벌어진 입을 닫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다 성민을 따라 원장실로 들어간다.
사형 판결을 앞둔 죄수가 법정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준호의 뒷모습에서 오버랩 되어 흐느끼며 반사되고 있었다.
뒤를 이어 반쯤 닫친 문을 열고 최박사가 차를 가지고 들어간다.
“준호씨, 점심 안먹었지요? 이 차 들고 저랑 같이 식사하러 가요. 당신도 차 한 잔 들어요.”
준호는 최박사가 가져온 차를 입술에 적시며 한입 머금은 체 앉았는데 성민의 두 팔이 다가와 어깨를 감싼다.
“준호야 천만다행이다, 네 자식이 널 살렸다. 조금도 걱정마라.”
성민은 준호 두 손을 어루만지며 위로한다.
“죽을병이냐?”
“걱정 할 것 없어, 아주 미세하게 초기 단계야. 정말 다행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최박사가 성민의 말을 거든다.
“준호씨, 의사가 실수로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해요. 걱정 하지 마세요.”
최박사는 숨을 죽이며 대답한다.
“암인가요?”
“세포가 변이되어 있어, 아주 초기야 영기라고도 하지. 세포변이 증식을 막기 위해서 처치를 해야 해.”
성민은 준호 손을 두 손으로 꼭 쥐며 말을 했다.
준호는 지그시 눈을 감는다.
이게 웬 날벼락인가.
살아오는 동안 남에게 해 끼치는 일 하지 않고,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한 적도 없는 준호다, 정적이라도 상처받는 말은 삼가며 어려운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정치소임 임을 되새기고 행동하며 살았는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지난 12년 동안 메마른 바위틈을 맨손으로 기어오르듯 고난에 십자가를 숨죽이며 부둥켜안고 살아온 세월이 부족하단 말인가?
또다시 준호에게 주어진 당신에 이 시련은 어떤 고통을 요구하며 무엇을 원한단 말인가.
60여년을 살아가면서 환희와 영광의 시간보다 벌레 먹은 나날들이 6할을 넘는데 얼마나 더 인고의 세월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몸서리치는 당신의 형벌에 순응하고 하루하루를 앉은뱅이 무릎 세우듯 순교자처럼 강심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살았지 않은가?
그대 조물주여, 너무나 가혹한 이 시련을 준호가 어찌 감당해야 한단 말입니까?
왜? 준호가 거무튀튀한 십자가를 또 다시 메고 험한 골고다 언덕을 넘어야 한단 말입니까?
두 눈을 굳게 감은 준호는 회환이 주마등처럼 흩어지자 허탈하게 숨을 내시며 눈을 떴다.
“준호씨, 괜찮아요? 저랑 식사하러 가시게요.”
최 박사는 눈물을 질금거리며 소매를 잡아당긴다.
“최 박사님, 고마워요 배는 고프지 않네요. 그리고 성민아 다음 일은 네가 알아서 준비해 줘라.”
“알았다, 내가 대학병원에 미리 연락 해놨으니 하루빨리 처치 할 수 있도록 하자. 얼른 집에 가서 준비해라.”
준호는 성민과 최 박사 배웅을 받으며 병원 문을 나선다.

병원을 나와 허공을 주시하다 준호는 차를 몰고 어디론가 달린다.
어둠이 밀려오지만 준호는 어디로 갈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길을 따라 달릴 뿐이다.
무엇을 먼저 어떻게 할지 정하진 못한 준호는 차를 세우고 뒤엉킨 머릿속에서 전달된 번호에 전화를 건다.
‘띠리리 띠리리.’
“여보세요?”
휴대폰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부인 목소리였다.
“…….
준호가 미처 대답을 못하자 부인은 재차 물어본다.
“당신 어디야?”
“응, 나야. 잘 있지 큰 처남이랑 오셨어?”
“어제 밤에 오셨어, 오늘부터 출근해야 하는데 휴가내고 오셨데.”
준호 처남은 강릉 아산병원 부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새해 며칠 동안 뭐 하셨데?”
“장모님이 요양원에 계시잖아. 이틀 동안 모시고 온 거래. 새언니가 무남독려 외동딸이라 새해가 돌아와도 찾아오실 분들은 오빠네 식구밖에 없잖아.”
준호 처남식구는 새해 첫날과 이튿날을 요양병원에 계시는 장모님을 만나고 왔다.
“큰처남도 장모님 모시다 늦게 오신 것이네?”
“그렇지, 장모님 요양병원에 다시 보내드리고 왔다는데 새언니가 울면서 여기까지 왔데.”
준호 부인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친정아버지를 6년 전부터 재활병원에 입원시켜 보호하고 있다.
“건강검진 결과 나왔지, 원장님이 뭐래?”
준호는 핸드폰 속으로 편안함이 묻어 나오는 부인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아 고민하다 말을 참는다.
“…….”
일 년 내내 친정아버지와 집안일 때문에 고생 만 하다 오랜만이 평온한 여유를 가지는 부인의 행복이 귓전을 스며들고 있었다.
“괜찮데?”
준호는 핸드폰과 얼굴 사이로 촉촉하게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밀어내며 속삭이듯 말했다.
“응.”
“그래, 당신은 워낙 건강한 사람이라 괜찮을 거야. 오늘은 어디서 저녁 먹을 거야?”
“아무데서나 먹지 뭐, 그런데 장인께서는 즐거워하시지?”
“응, 오랜만에 밖에 나오시니 웃음꽃이 피셨어. 당신 많이 찾으시더라.”
준호 장인어르신은 재활병원에서 고생하시다 외박을 나오셨다.
재활병원에서 고생하시는 친정아버지를 준호 부인은 신년연휴를 활용해 무주리조트 설산과 상쾌한 겨울바람을 쏘여 드리기 위해 일 년 반 만에 외출한 시간이다.
15년 전 만해도 준호 장모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신년이면 으레 온 가족형제가 바람 쐬기 위해 방문하는 리조트였다.
“장인어른 옛 생각 많이 나시겠네, 장모님도 생각나고?”
“모르지, 기억이 희미하셔서 기억이 나실는지 모르겠어. 범수가 자꾸 할머니 이야기를 하니까 고개 만 끄덕 거리시네.”
“당신이 애쓰네.”
“아녀, 힐체어는 범수가 미니까 아버지가 좋아하셔. 나도 오랜만이 바람 쐬고 스키 타는 것 구경하니까 마음도 상쾌해.”
“재미있게 놀다와. 시간내서 곤도라 타고 향적봉도 다녀오고.”
“알았어, 모레 늦게 집에 도착 할거야. 밥 굶지 말고 꼭 챙겨 먹고 다녀 추우니까 당신 사는 임실 집 따뜻하게 보일러 꼭 틀고.”
“그래, 전화 끊을께.”
준호는 정작 해야 할 말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세화씨와 준호 신혼여행지도 무주리조트였다.
평생 축복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라는 장인의 말씀대로 결혼 날짜를 크리스마스 날로 정하여 양가부모 형제를 모시고 조촐하게 예식을 정하며 신접살림을 차린 혼례다.
집회와 시위법 위반으로 수배 받고 옥고를 치르고 나온 준호에게 세화씨는 천사였다.
자기가 돌보지 않으면 평생 가을날 낙엽마냥 뒹굴며 살 것 같아 결혼했다는 세화씨의 말처럼 준호는 부평초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돈 벌지 않아도 출세하지 않아도 준호가 좋아하는 글 쓰며 살자고 눈물을 글썽이는 세화씨의 간청으로 맺어진 결혼이다.
결혼식이 끝나고 준호가 손수 운전하는 승용차로 모래재를 넘어 무주로 소풍 가듯이 간 신혼 여행길은 한 폭의 수채화였다.
온 천지가 하얀 눈으로 뒤 덮여 정오가 지나서야 오가는 차길 만 움푹 패여 또렷이 보였다.
그 길 따라 준호는 꽃다운 세화를 태우고 신혼여행길 떠났다.
준호는 그 시절 생각에 미소를 띄우며 그리움으로 젖다가 야속한 현실에 슬픈 상념으로 잠긴다.
창공을 날던 날개가 꺾여 풍찬노숙의 세월을 지낸지 벌써 12년 세월이다.
12년의 낭인생활에 얼굴 한 번 구기지 않은 세화다.
그러나 추락한 것은 날개도 없다고 했던가?

차창 밖으로 어둠이 짙어가고 있었다.
‘삐리리, 삐리리’
핸드폰 벨이 울린다.
핸드폰 액정에 친구 박성민이라고 쓰인 번호가 잔잔한 호수에 파문을 일 듯 울려댄다.
준호는 화면을 제치고 전화를 받는다.
“어, 성민아.”
성민은 성난 목소리로 다급하듯 소리친다.
“누구하고 통화를 그렇게 오래 하냐?”
“집사람.”
“세화씨 말이야.”
“그래, 범수 엄마.”
“어디 가셨어? 현재 집에 안 계시는 거야!”
“응, 장인어르신께서 일 년 반 동안 재활병원에 계셨잖아. 신년이고 해서 범수랑 무주리조트 모시고 갔어, 바람 쏘여 드린다고.”
“이것 큰일 났구나, 네 성격에 범수 엄마한테 말 안했지? 내일 아침 8시까지 대학병원에 입원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냐?”
“나 혼자 가서 입원하면 되지 뭐.”
“입원수속은 너 혼자 밟는다 해도, 보호자 없으면 처치를 안 해 주는데 누가 보증을 서냐? 입원하려면 여러 가지 용품도 준비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래?”
성민은 대학병원에 모든 연줄을 동원해 처치 날짜를 서둘러 잡아 입원을 예약해 놓았다.
“범수 엄마한테 미안해서 말을 할 수 없었어.”
“그래 잘했다, 그럼 어떻게 할래? 이게 보통 일이냐!”
“생각해 볼게.”
“뭐여, 생각해 본다고!”
준호는 남의 일처럼 건성으로 말을 하자 성민은 화를 내며 전화를 쏘아붙인다.
“내가 뭐라고 해도 네 성격이 바뀌겠냐. 너는 내일 아침 8시 까지 대학병원에서 입원 수속하고 있어. 내가 병원 문 열어놓고 늦어도 9시까지 대학병원으로 갈테니까.”
“…….”
준호는 또다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전화를 끊고 집 쪽으로 차를 돌렸다.
아파트 내 주차장은 주민들이 연휴를 떠난 탓인지 휑하니 찬바람 만 불었다.
준호는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바치고 현관문을 열어 집안으로 들어간다.
아무도 없는 집안은 싸늘하게 한기가 얼굴을 스치고 거실 바닥에는 추운 날씨 탓인지 냉기가 서려 몸속까지 파고들었다.
어둠을 헤치고 벽면을 더듬어 스위치를 누르니 거실 중앙등이 대낮같이 환해져 눈을 찡그리다 순간적으로 사치스러움을 느낀 준호는 다시 등을 끄고 자그마한 벽면등을 켠다.
준호는 쇼파에 한참을 앉아있다 캐리어에 주섬주섬 옷가지를 담는다.
범수엄마 없이는 단 한 번도 캐리어에 물건을 담지 않았던 준호는 옷가지를 찾아 넣으려 하니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 얼굴을 캐리어에 파묻고 소리 죽이며 눈물을 쏟아낸다.
캐리어는 여행을 떠나는 이에게는 추억의 가방이 될 수 있지만 죽은 망자에게는 유품을 정리하는 이별의 가방이기도 했다.
한참을 흐느껴 울던 준호는 마누라 없는 안방에 들어가 장롱 속에 있는 옷가지를 주섬주섬 집어 들고 나와 캐리어에 담고 화장실에서 꺼내 온 세면도구를 비닐에 구겨 넣어 싼다.
준호는 병원에 입원 할 준비물을 캐리어에 대충 담아 놓고 쇼파에 비스듬히 앉아 눈을 감아보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밝은 등불이 사치스럽듯이 보일러를 트는 것도 낭비 하는 것 같아 준호는 싸늘한 방에서 몸을 움츠리며 밤을 지새운다.
어둠이 가득한 한 밤중에 작은 불빛이 커텐 사이로 반짝이다 사라지며 쓸쓸한 한기를 품어내고 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준호는 동이 뜨기도 전에 부인이 닫고 간 커텐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핸드폰 시계는 4시를 알리고 있지만 주차된 자동차 위까지 하얗게 쌓인 설경 덕택으로 어둠은 멀리 자취를 감추고 그리움이 뭉클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준호는 온수를 틀어 가볍게 샤워를 마친 후 욕실 바닥에 뿌려져 있는 물기를 단막극 처리 하듯 소리 죽이며 조용히 닦아 내려간다.
거리는 간밤에 폭설로 자동차들이 서로 엉켜 비틀 빼틀 꿈틀대며 걸어갔다.
비상등을 킨 자동차들은 15센치 넘게 도로에 쌓인 눈과 차창 밖으로 부딪혀 오는 눈발을 헤치며 수색대 전사처럼 거북이걸음으로 한발자국씩 앞당겨 나간다.
라디오에서는 대설주의보가 흘러나오고 1킬로미터를 가는데 30분이 걸렸다.
눈발은 더욱 굵어져 가고 있다.
빨간 신호등에 걸려 멈춰서 있는 하얀 눈 사이로 세화 얼굴이 떠오르며 말을 건네 온다.
“당신, 눈 많이 오는 날에 나랑 꼭 듣는 노래 틀어봐.”
“어떤 노래?”
“당신하고 처음으로 함박눈 맞으며 갔던 곳이 정읍 내장산이던가? 그때 당신이 알려줬던 썅송 틀어봐.”
“응, 그 노래.”
‘텀베라 네이션, 이노비아 빠스소아~.’
샹송은 차 안을 그윽한 추억의 향기로 가득차고 파란불이 깜박이는 횡단보도로 가방을 둘러 맨 개구쟁이 초등학교 어린 학생이 엉금엉금 건너다 넘어진다.
그 뒤를 폐지를 줍기 위해 손수레를 끄는 할아버지께서 초등학생 뒤를 따르며 넘어진 아이를 한손으로 일으켜 세우며 수레와 함께 행단보도를 건넌다.
하얀 도로 위를 함박웃음만큼이나 다정한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재잘거리며 제각각 길을 떠난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가슴이 뛰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밤새 잠을 설친 탓과 평소보다 일찍 나온 덕택으로 대학병원 약속시간은 지킬 수 있었다.
준호는 지하주차장에서 에스카레이터를 타고 대학병원 정문으로 들어와 병실 침대에 몸을 맡긴다.
고약한 놈을 만나기 위해 링겔에서 떨어지는 방울을 응시하며 멀어져가는 의사의 말소리에 눈을 감는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준호는 아른거리는 허공을 주시하며 저 멀리 천장에서 희미하게 내리쬐는 수은등을 포근히 받아들이고 있다.
가물거리는 기억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려는 준호의 몸부림은 따뜻한 배냇저고리를 입에 물고 옹알거리는 천진한 아이였다.
준호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일 년 전에도 먼 나라를 다녀온 어린왕자처럼 허공을 맴돌다 돌아와 잘게 부서진 햇살에 눈을 뜨며 앳된 얼굴로 눈을 떴다.
끝없이 펼쳐진 풀밭 길을 나비 따라 뛰놀다 새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나뭇가지에 매달린 아련한 기억만이 어렴풋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한여름이면, 준호는 패랭이 꽃길 따라 뙤약볕을 맞으며 새내길을 가로질러 방천둑을 넘어가면 섬진강 저편 모래밭에 듬직하게 홀로 서있는 늙은 오디나무를 찾는다.
강 건너 저편 모래밭 모서리에 자리한 늙은 뽕나무는 언제나 탐스럽고 까맣게 익은 오디를 선물로 내어준다.
삼베 바지만 입은 까까머리 준호는 늙은 뽕나무를 날다람쥐처럼 기어올라 탐스러운 오디를 한입 두입 따먹으며 별님과 함께 꿈을 꾸다 여름을 지낸다.
한여름 뙤약볕 까까머리에 윗도리 없이 늙은 뽕나무에 오른 준호는 삭은 다리를 밟고 삼베 바지통이 나무 가지에 매달려 거꾸로 먼 나라 왕궁으로 갔다.
광목 허리띠로 단단히 고정된 삼베바지는 벗겨지거나 찢어지지 않아 준호는 한 나절을 매달려야만 했다.
소리를 질러도 입안에서 맴도는 메아리가 인적 없는 강가를 울먹일 뿐 준호는 먼 나라 왕궁에 천사의 호의를 받으며 그렇게 갔다.
희미해진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지만 점점 몽롱해지는 안락함에 정신을 잃어버린 준호는 먼 나라 어린왕자로 변했다.
그렇게 정신을 잃어버린 준호는 해가 중천에서 따갑게 부서지듯 내리쬘 때
간신히 꿈길에서 깨어나 어머니가 달아주신 호주머니 조약돌을 만지며 눈을 뜰 수 있었다.
고개를 비껴 틀고 옆을 바라보니 옆집 벙어리 아저씨가 휘둥그레진 눈빛으로 고갯짓을 하고 그 옆에 가냘픈 준호 부인이 소리 없이 눈물 짖고 있었다.
잘게 부서진 따사로운 햇볕은 수은등으로 되돌아와 따뜻하게 준호를 안아주고 있다.
따사로움과 감미로움을 흠뻑 젖은 준호는 엷은 미소를 머금은 체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보,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긴 복도를 따라 입원실로 올라가는데 창밖으로 하염없이 눈이 내린다.
필연적인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할 때 인간은 위대 해진다.
누구나 고통과 상실까지도 받아들이는 삶을 사랑하며 소설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뿌린다.
눈 오던 날 같이 걷던 영화 속 삶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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